화도진공원, 치열한 역사의 숨결을 느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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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롭게만 보이는 조용한 인천의 한 공원을 찾았다. 근처에 사시는 어르신들의 아늑한 산책로로도 그만이었던 음악이 흐르는 공원에는 그 조용한 분위기와는 사뭇다른 역사의 숨결이 살아있다는 것을 발길을 해 보고는 느끼고 만다.

인천광역시 동구 화수동에 있는 공원인 '화도진 공원'은 입구의 작은 규모와는 달리, 안으로 들어서면 약 2만 ㎡ 규모의 '화도진 공원'의 내부가 펼쳐진다. 이 공원은 한미수교 100주년을 맞아 1982년 조성된 공원으로, 그 이전 1882년에는 '조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된 역사적 현장으로 알려져 있다. '동헌, 안채, 사랑채, 전시관' 등으로 복원이 되었으며 주변에는 녹색의 자연이 한데 잘 어우러져 많은 이들의 발걸음을 재촉하는 공원이 되었다.

안채를 들어서 살펴보면 역사속 삶이 어떠했는지를 볼 수 있는 여러 자료들이 재연되어 있어 호기심을 풀어줄 계기가 된다. 그 옛날 사용했던 '반짇고리, 버선장, 반닫이, 삼층장' 등 그외에도 많은 살림살이들이 시대의 삶을 짐작케 한다. 안채가 각종 생활상을 알 수 있는 모습이 재연되어 꾸며져 있다면, 사랑채는 병영건물들이 들어서 있어 여러 모습을 볼 수도 있다. 군인들의 모자와 갑옷, 옷가지 등을 볼 수 있기도 하다. 약 600여 점의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고 하니 궁금한 시대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화도진'이라는 이름의 유래는 그렇다면 언제부터 쓰여졌을까? 이 뜻은 약간 다른 설이 있긴 하지만, 육지를 뜻하는 '곶'에서 따왔다는 말이 있다. 육지의 곶과 섬을 이어 '곶섬'이라 하였고, 이어서 좀 더 쉽게 발음하기 위하여 '꽃섬'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꽃섬'이 그렇다면 왜 '화도진'이란 이름으로 재탄생 했을까? 그것은 한자를 생각해 보면 그 유래를 쉽게 알 수 있을 것 같다.

한자로 '꽃'과 '섬'을 옮겨적으면 '꽃화(花)'에 '섬도(島)'. 즉 '화도'가 된다. 나머지 '진'은 진영을 뜻하는 말일지니.. 왜 '화도진'이라 불렸는지 알만한 유래라 할 것이다. 또 어떤 설에는 지명이 단지 '화도리'였기에 그렇게 불렀다고 하지만, 역사적으로 봤을 때에는 단순한 화도리는 아녔을 법하기도 하다.

'화도진'은 역사적으로 치열한 투쟁의 숨결이 남아있는 곳이기도 하다. 고종은 새롭게 밀려드는 외세에 대응해서 1879년 화도진을 설치하게 되었다고 한다. 개항 이후 일본이 험난한 강화 수로를 피해 인천 쪽의 육로를 이용하여 서울에 진입하려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한다.

이곳에 있는 화도진사는 강화로 통하는 수로를 내려다보면서 효과적으로 방어할 수 있는 요점이었던 것이다. 동시에 바다에서는 응봉산에 가려 잘 보이는 않는 구조였기에 몸을 숨기고 적들의 움직임을 세세히 관찰할 수 있었기에 좋은 요점이었다고 전해진다.

그런 역사의 치열한 항쟁의 숨결이 살아있는 '화도진 공원'을  살펴보기로 한다.


화도진공원에 도착하여 들어서는 입구에는 작은 폭포가 하나 자리해 있었다. 돌 위로 자연스레 내리치는 물살은 그 양이 적어 더욱 조용히 바라볼 수 있었다.


입구에 들어서서 음악 소리를 들으며 걷는 거리 너머로 '화도진'의 옛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공원 안채가 눈에 들어온다. 마침 근처 공기를 쐬러 나오신 어르신들의 모습은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걸어가는 길 옆에는 '석지(石池)'가 눈에 띄었다. '석지'는 전통 건축의 정원이나 건물 사이에 배치하여 물에서 자라는 식물을 기르거나 맑은물을 담아 투영미를 감상 하는데 사용하였다고 한다. 화도진 공원 입구에 설치된 '석지'는 10세기 후반 화도진영에서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적혀 있었다.


또 하나 입구에서 눈에 띄었던 것은 '효도 권장비'였다. 효를 행해야 하는 것은 본을 세우는 것이라는 말과 함께 요목조목 좋은 말들이 쓰여있어 한 번 쯤은 꼭 읽어보라 추천을 하고 싶었던 내용들이었다.


역시나 이곳이 역사적 중요한 보물이라는 것을 보여주듯, 입구에는 화도진의 주요 역사적 내용들이 기술되어 있는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다. 화도진이 만들어진 시대였던 고종 15년 이야기로 시작되는 이야기는 읽어봐야 이곳의 제대로 된 구경을 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 준다. 우리가 쉽사리 지나치는 이런 역사적 내용은 알아야 그만큼 제대로 된 지식을 가지고 볼 수 있기에 읽어보는 것이 중요하다.


안채로 들어서서 당시의 생활상을 살펴볼 수 있었다. 마침 화도진 공원에 상주하고 계셨던 해설사 분의 도움으로 좀 더 자세한 화도진에 대한 지식을 알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신미양요 때의 미국함대 침입로와 병인양요 때의 프랑스 함대의 1, 2차 침입로들에 대한 정보도 얻을 수 있었다. 치열한 역사의 아픔들까지 느껴지는 듯한 내용들이었다.


안채에서 마침 바라본 하늘은 청명하기 그지없었다.


안채에서 공원 주변길로 통하는 문도 있었지만, 잠겨있던 날 방문길이었다. 축제가 열리고 사람들이 많이 찾는 길에는 열려 있을 법한 문의 모습을 뒤로 촬영을 하고 돌아선다.


작은 층계를 걸어올라 사랑채로 들어선다. 보이는 모습은 '내사' 즉 안채의 모습이다. 안채는 즉 안주인이 거처로 사용하는 곳이기에 활용 빈도가 높은 공간으로 곳곳에서 당시 생활상을 느낄 수 있었다.


안주인이 바라본 하늘은 이런 모습이었을까?!


돌아 나오는 길에는 당시 생활상을 알 수 있는 물건들이 잔뜩 전시되어 구경할 수 있다.


공원 내 야외전시장을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 처음 바깥채를 보고 사랑채를 지나 안채를 보고 다시 바깥채로 나와 야외전시장을 향해 발길을 내딛는다. 지난 가을이 시작되기 전 발걸음이었던지라 아직은 낙엽이 많이 떨어지지 않은 시점의 발길이었다.


야외 전시장으로 향하는 길 왼편을 보니 바깥채와 연결된 화도진 대문 현판이 눈에 들어오기도 한다.


거리를 타고 내려가다 보니 '화도진 언덕' 야외전시장이 나온다. 기념비와 함께 전시장에는 화포들이 자리해 있었다. 화도진 언덕은 1882년 5월 22일 한미 양국의 대표들이 양국 외교관계의 첫 장을 여는 한미수호통상조약을 조인한 곳으로 이를 기념하여 1982년 이 표지석을 세웠다고 쓰여 있었다.


실물 화포를 볼 수 있는 기회로도 좋은 방문길이 되지 않을까 한다. 그것도 야외전시장에서 말이다.


화도진 언덕을 내려와 유명하다는 화수동 '쌍우물'을 구경하기 위해 도착한 곳이었다. 놀라웠다. 우물이라고는 했으나, 느낌으로는 일반 드라마 세트장 같아보이는 쌍우물의 모습은 경악스러운 즐거움을 줬다. 좀 더 세밀하고 진짜같은 모습을 바랐건만,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쌍우물'은 인천 향토지에 무네미 어귀에 쌍으로 있던 우물이라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쌍우물은 말 그대로 두개가 있었는데, 지금은 건물이 들어서 없어졌다고 하니 안타까울 수밖에 없었다. 이 쌍우물은 화도진을 지키던 군사와 인근 주민들의 식수로 쓰였다고 한다.


우물 옆 쉼터에는 벽화와 함께 조형물이 있어 근처 아이들의 놀이터로 애용되는 모습이 친근해 보였다.


거리 이름도 둘러보니 '쌍우물로'였다. 작은 바람이라고 한다면 '쌍우물'이 조금이라도 옛스러운 분위기를 띄는 모습의 실물과도 같은 모습으로 복원이 다시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보는 발걸음이었다.

'화도진'의 이야기는 맛배기 정도만을 보여주는 것이 될 수밖에 없어 보인다. 직접 보고 역사의 치열했던 숨결을 느껴보는 계기는 직접 자리해 당시 흔적들을 되밟아 보는 계기가 더 직접적인 자극이 될 것으로 보인다. 어이든 약간의 아쉬움은 있을 테지만, 이번 발걸음은 또 하나의 기록으로 좋은 추억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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